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문단 편집) === 재판 === [[파일:체포된 응게마.jpg]] 재판을 받는 응게마의 모습. 상술한 이유로 왼쪽 팔뚝에 총상을 입어 붕대를 감고 있다. [youtube(i9fJS5BxiPg)] 응게마의 재판을 담은 컬러 기록 영상.[* 원본에는 1979년 9월 23일 영상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오기로 보인다.] 응게마는 블랙 비치 교도소에 수감된 후에도[* [[https://www.britishpathe.com/asset/198852/|수감 당시 응게마의 모습]]] 대통령처럼 대우해달라고 요청을 하고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마시아스가 물을 달라고 한 후 군인들이 근처 샘에서 물을 가져오면 응게마는 화를 내며 '대통령의 물'을 가져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을 찾아오는 외국 기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우리나라를 나쁘게 말할 것이다'라고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고, 1979년 9월 24일 응게마는 낡은 영화관에서 열린 특별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제노사이드, 횡령, 인권위반 및 반역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응게마의 판사 탄압의 영향으로 적도 기니에는 이미 유효한 법적 시스템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 재판은 스페인 군법에 따라 치러졌다고 한다. 이 재판 과정에서 응게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을 보려주었다. 응게마는 처음부터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와 비난에 대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고 일축하며 법원에 관용을 요청했고, 법원에서 자신을 재판하는 재판관을 '편파적'이라고 하며 '부하들의 독단적 행동에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당시에 많은 관리들이 마시아스의 명의로 마시아스가 승인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긴 하나, 어쨌든 이런 범죄들의 최종 책임자는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던 응게마이다.'''], '나는 국가원수였다. 나는 교도소 소장도 교도관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집권할 동안 일어난 살인과 고문 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나라의 유일한 기적이다', '나의 재판은 적들의 시기와 증오에 의한 것이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응게마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수행한 광범위한 선행에 대해 설명하는 성명서를 법원에 제출하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으며,[* 응게마는 외교 사절단을 수용할 목적으로 1972년의 2개의 고급 호텔과 은행, 건물, 교육 센터 및 국제 항구도 건설하는 등의 공공 사업에 거액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설들은 적도 기니 사람들이 전혀 사용할 수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전시행정]]을 국가 인프라 건설로 진지하게 여긴 응게마는 자신이 국가에 '진정한 호의'를 베풀고 있으며 자신의 [[이니셔티브]]가 국민들의 일반적인 이익을 대표한다고 믿으며 이 모든 작업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최종 변론에서도 '나는 국가의 아버지이자 지도자로서 스페인 식민 세력을 추방했으니, 용서를 구하며 재산을 돌려주고 석방시켜 고향에서라도 살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 물론 재판에서 응게마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물며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니 [[심신미약]]을 감안해 감형해 달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지만, 응게마는 법원에서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검사는 그런 응게마에게 사형, 다른 피고 5명에게 30년형, 다른 4명에게는 1년형을 구형할 것을 요청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응게마는 소련 대사관 관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이조차 기각당했다. 여담으로 응게마는 재판 당시 판사들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이는 처벌을 면하기 위해 꾀병을 부린 것이 아니라 응게마가 실제로 난청을 앓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